성경 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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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명]
1. 하몰의 아들. 성읍 세겜과 그 주변 지역을 다스린 히위 족속의 족장이다. 야곱이 하몰의 아들들로부터 토지를 구매했을 때부터 세겜은 야곱 가족과 교제를 갖게 되었다(33:19). 그런데 야곱의 딸 디나가 그 땅의 여인들을 방문했을 때, 세겜은 그녀를 끌어들여 강간하였다(34:2). 그리고 나서 그는 아비하몰에게 그녀를 아내로 얻게 해 달라고 간청하였다(4절). 야곱의 아들들은 이스라엘의 관습을 부분적으로 인정한다는 표시로 성읍 세겜의 모든 남자들이 할례를 받는다는 조건하에서, 결혼을 통해 인척 관계를 맺자는 하몰의 제안을 받아들였다(13-17절).
이에 세겜을 포함한 성읍의 남자들은 부유한 야곱 가족과의 통혼을 통해 부유하게 될 것을 기대하면서, 그러한 요청에 따라 모두 할례를 받았다(18-24절). 세겜 사람들이 할례로 말미암아 무기력하게 되었을 때, 야곱의 두 아들 시므온과 레위는 모든 세겜 남자들을 죽이고, 성읍을 약탈하였으며, 누이 디나를 집으로 데리고 왔다(25-29절). 그 후에 야곱의 두 아들을 책망한 사건(30절)은 보다 넓은 상황에서 볼 때(비교. 신 7장) 이 이야기의 분위기를 크게 결정짓고 있으며, 또한 시므온과 레위 지파의 흩어짐과도 관련이 있다(참조. 창 49:5-7).
2. 므낫세의 자손으로서, 므낫세 지파 세겜 가족(히. ´쉬크미´)의 조상이다(민 26:31,수 17:2).
3. 므낫세 지파인 스미다의 아들이다(대상 7:19). 바로 위의 세겜 9와 동일 인물로 추측된다.
[지명]
발산과 그리심산 사이의 에브라임 산지에 위치한, 가나안 족속과 이스라엘 자손의 한 성읍이다. 이 곳은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가 함께 모여 언약 의식을 행한 장소이다(수 24장). 애굽 12왕조의 <저주 문헌> (Execration Texts)에서 이 성읍은 통치자 ´아브쉬-아다드´(Abshadad)의 도시로 언급되어 있다. <아마르나 서신> (Amarna Letters)에서는 왕라바유(Labayu)의 성읍으로 나오는데, 그는 이 도시를 그가 지배했던 많은 성읍들의 중심지로 삼았다.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 도착한 후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서 여호와를 위한 단을 쌓았다(창 12:6-7). 야곱은 밧딘아람에서 돌아온 후 이곳에 그의 장막을 치고 세겜 사람으로부터 토지 일부를 구매하였다(33:18-19). 그리고 아브라함처럼 그도 또한 세점에 단을 쌓았다(20절). 또한 이곳에서 야곱의 딸 디나가 하몰의 아들 세겜에게 강간을 당했는데 그녀의 오빠 시므온과 레위가 복수를 행하였다(34장). 야곱은 세겜 근처 상수리나무 아래에 그의 아내들이 간직하고 있던 가정 우상들을 묻었다(35:4). 요셉의 뼈는 야곱이 하몰로부터 구매한 바로 그 땅에 묻혔다(수 24:32, 참조.행 7:16).
여호수아는 세겜에 서행한 언약 의식 중 일부로 ´여호와의 성소 곁에 있는 상수리나무 아래´에 큰 돌 하나를 세웠다(수 24:26). 므낫세 지파와 에브라임 지파의 영토경계에 인접한 세겜은(수 17:7) 레위지파의 성읍인 동시에 도피성이 되었다(20:7, 21:21).
바알브릿(엘브릿)의 신전은 세겜에 서 있었다(삿 9:4, 46). 기드온이 죽은 이후에 세겜의 주민들은 이 신전의 보고에서 은 70개를 꺼내어 그의 아들 아비멜렉에게 주고, 그를 왕으로 삼았다(4절). 그런데 그들이 아비멜렉의 통치에 반기를 들자, 그는 이 성읍을 파괴해 버렸다(45절). 이때에 세겜 망대(히. ´미그달-쉐켐´) - 아마도 성읍 외곽의 한 요새(6, 20절에 나오는 벧밀로와 같은 곳으로 추정 됨)인 것 같다 - 의 거민들은 신전으로 피신했으며, 아비멜렉은 이 곳을 불질러 버렸다(46-49절). 솔로몬이 죽은 이후에, 르호보암은 세점에서 거행된 즉위식에서 회유적인 제스처를 씀으로써 북쪽 지파들이 돌아와 유다 지파와 연합하기를 희망하였다(왕상 12장, 대하 10장). 그러나 북쪽 지파들은 그를 떠나 여로보암 1세를 왕으로 삼았으며, 세겜을 첫 번째 수도로 건설하였다(왕상 12:20, 25).
이 도시는 북왕국의 수도가 디르사로 옮겨진 이후에도 계속해서 그 지방의 중심지로 존속하였다. 세겜은 B.C. 722년에 앗수르에 의해 파괴되었다. 세겜에서 온 순례객들은 바벨론 총독 그다랴를 살해한 사람들에 의해, 또한 미스바에서 살해당한 사람들 가운데 포함되어 있었다(렘 41:5). 이 성읍은 바벨론 포로기 이후에 에스라와 느헤미야 공동체와 관련해서는 언급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역사가 요세푸스는 세겜이 알렉산더 시대에 사마리아인들의 중요한 도시였음을 말하고(Ant. xi. 8.6 (340)), 이 도시가 요한 히르카누스(John Hyrcanus)에 의해 파괴 되었음을 기록하고 있다(xiii. 9.1[255]) ).
세겜의 위치는 오늘날의 나블루스(Nablus)에서 동쪽으로 1km 지점에 있는 `텔발라타’이다. 이 지역에 사람들이 거주하기 시작한 것은 신석기에서 청동기로 넘어가는 시대(B.C. 3600년경 )에 몇 군데 조그만 촌락이 생기면서부터였다. 청동기시대 중기(B.C. 1900-1540), 특히 애굽의 힉소스(Hyksos) 왕조 시대에 세겜은 중요한 도시 국가가 되었다. B.C. 16세기에 이 지역은 무참하게 파괴되었다. 그러나 [아마르나 서신]이 입증하고 있듯이, 세겜은 B.C. 14세기까지 중요한 도시 국가로 재부상하였다.
B.C. 1125년경에 이 도시는 재차 파괴되었으며-아마도 아비멜렉에 의해서 (삿 9장) -1세기 또는 그 이후에 겨우 재건되었다가 B.C. 722년에 앗수르에 의해 다시 파괴되었다. 헬라 시대에 사마리아 사람들은 세겜을 복구하고, 그리심 산에 사마리아 신전을 세웠다. 하지만 B.C. 107년에 히르카누스가 세겜을 완전하게 초토화 시킨 이후에 이 지역은 완전히 버려졌다. 세겜에 대한 발굴 과정에서 몇몇 신전이 발견되었다. 가장 초기의 것은 마당 성소(courtyard sanctuary)들인데, 이것들은 창세기에서 언급된 것과 같이 어떤 나무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후에 이것은 거대하고 견고한 신전으로 대체되었는데, 어떤 기간에는 여호수아가 세운 큰 돌과 같은 것으로 보이는 여러 주상들을 갖추고 있었다. 아무튼 구약에서도 반영되어 있듯이, 성소로서 세겜의 전통은 그 지역의 정치적 변화 속에서도 지속되었음이 분명하다.
※ 참고 문헌
G.E Wright. Shechem : The Biography of a Biblical City(Garden Clty: 19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