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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로포네소스 반도와 그리스 본토를 연결하는 좁은 지협(地峽)의 남쪽 약 2㎞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 도시이다.
서쪽으로는 ‘고린도 만(灣)’이 있으며, 동쪽으로는 ‘샤론 만’이라고 불리우는 ‘아에기나 만’이 자리잡고 있다. 따라서 이 도시는 해상 무역에 알맞는 입지조건을 갖추었기 때문에 예로부터 많은 상인들이 몰려 들었다. 서쪽으로는 이탈리아, 스페인 상인들이 레카에움 서쪽만에 정박했으며, 동쪽으로는 이집트와 동방의 상인들이 그들의 배를 겐그레아만(고린도 동쪽 약 11㎞ 지점에 위치함)에 체류시켰다. 그들은 펠로포네소스 남단의 위험한 말레아곶을 돌아오기보다는 작은 배들을 육지로 끌어 올려서 지협을 가로질러 고린도까지 옮길 수 있도록 길(헬. ‘디올코스’: “배를 옮길 수 있도록 만든 육지의 길”)을 만들었다.
로마의 황제 네로는 그 지협을 뚫는 길이 약 5㎞의 운하 시공을 계획했지만, 그것의 최종적인 완성은 1983년에야 실현되었다.
Ⅰ. 역사
B.C. 4000년까지는 사람이 살지 않은 곳이었지만, 그리스의 도시 국가들이 서쪽에 식민지를 세우기 시작했던 B.C. 8세기에는 고린도시가 군사적으로나 경제적으로 그리스에서 첫 번째 가는 힘을 가지게 되었다. 이 도시의 큰 부와 명성은 약 B.C. 600년에 까지 이르고 있다.
펠로포네소스 전쟁(B.C. 431-404년)시에는 스파르타를 도와서 아테네에 대항하였다. 또한 이곳은 알렉산더 대왕이 주도했던 헬라 동맹 중심지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B.C. 146년에는 로마의 장군 루시우스 뭄미우스에 의하여 정복·파괴되었다. 그 후에 반-로마운동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B.C. 44년에 율리우스 시저에 의하여 재건되어 로마의 이주민들이 정착하였다. 이로써 고린도는 로마 정부의 소재지로서 아가야 지방의 수도가 되었다. 심지어 학문과 문화의 중심지였던 아테네를 능가하면서 로마, 그리스, 유대, 시리아, 이집트 사이의 교통 중추로서 자리를 잡아갔다. 그러나 고린도는 그 명성에 알맞게 행동하지 못했다. 그 곳의 귀족들은 부의 축척을 제일의 가치로 여겼다.
그 결과 고린도는 악과 부도덕이 혼재하는 천박한 도시로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헬라어 ‘코린디아조마이’(“부도덕을 훈련하다’)는 고린도에서 유래된 말이다. 그 도시에서 제일 높은 곳에 세워진 아프로디테의 신전에는 천여명의 여사제들이 살았는데, 그들은 그 지역 주민들 뿐 아니라 외국인들을 상대로 종교적 행위로서의 매춘을 행하였다. 바울이 고린도인들에게 보내는 첫 번째 편지에서 고린도의 이러한 배경이 반영되고 있다. 고린도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원리적으로 성적인 부도덕을 버렸지만, 실제적으로는 교회 내의 그러한 부도덕을 용납하고 있었다.
A.D. 2세기경에는 황제 하드리안(Hadrian이 아름다운 여러 공공 건물들을 건설함으로써 도시를 새롭게 하였다. 이 도시는, 1458년 사라센에 점령당하기 전까지인 중세 시대에도 그 부를 누릴 수 있었다. 1858년에는 가공할만한 대지진이 고린도시에 발생하여 폐허가 되었다. 그 후 이 곳 도시민들이 고대 도시에서 악5㎞쯤 떨어진 곳에 오늘날의 시가를 재건하였다.
Ⅱ. 고고학적인 발굴
고대 고린도의 유적 발굴에 참가한 학자들은 옛 로마 도시의 중요한 건물들의 위치를 상당한 정도로 찾아 볼 수 있었다. 고린도는 두 개의 시가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우뚝한 언덕을 배경으로한 아크로고린도(Acrocorinth, 해발575m)는 아프로디테의 신전이 위치한 곳으로 유명하며, 요새 가운데 하나이다.
레가에움(Lechaeum) 도로변에는 상점들이 광장 가까이에 자리잡고 있다. 이 광장 부근에서 발견된 라틴어로 새겨진 한 비문에는 ‘마셀룸’ (시장, 참조.고전 10 : 25 헬. ‘마켈론’)이라는 단어가 기록되어 있었다. 상가 중앙에는 단(헬. ‘베마’)이 있었는데, 이 곳은 아마 바울이 유대인들의 율법에 반대되는 교훈을 가르쳤다는 이유로 잡혀왔던 곳일 것이다(행 18 : 12).
광장의 북쪽에는 큰 공회당과 낮은 기둥 둘을 가진 직사각형의 방이 있는데, 재판과 상거래의 용도로 사용되던 곳이다. 공회당의 서쪽에는 아폴로 신전이 자리잡고 있으며, 이곳 부근에서 발견된 흰 대리석 조각에는 헬라어의 앞, 뒷부분이 없이 ‘~고게 에브라~’만 남아 있는데, 필시 “유대인의 회당”이라는 뜻인 ‘쉬나고게 에브라아이온’의 일부일 것이다. 이것은 유대인들의 회당문 윗 인방에 붙였던 것인 듯하다. 바울의 설교가 이곳에서 이루어졌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18 : 5).
특별히 관심을 끄는 발굴물은 라틴어가 새겨져 있는 비문인데, ERASTVS. PRO. AEDS. P. STRAVIT(“에라스투스는 자신이 조영관[관직 이름]이 되었다는 것을 감사하는 뜻에서 자신의 비용으로 포장 도로를 놓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아마 A.D. 25-50년 사이에 일어난 사건인 듯한데, 이 사람은 필시 롬 16 : 23에서 바울이 언급한 인물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바울의 친구로서 이방의 유대교인으로 기독 교회에 들어온 사람이었다.
※ 참고 문헌
American School of Classical Studies at Athens, Ancient Corinth : A Guide to the Excavations, 6th ed. (Athens : 1954) ; J. MurphyO’Connor, St. Paul’s Corinth(Wilmington : 1983) ; G. Theissen, The Social Setting of Pauline Christianity : Essays on Corinth(Philadelphia : 1982).